시선과 심장이 동시에 반응한 순간, 기억은 세포로 새겨진다
낮과 밤,
두 번의 손님 아닌 손님의 방문이 내 삶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는가.
문득,
이유 없이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 시선은 멈추고, 공기는 얇아지고, 몸이 가장 먼저 상황을 알아챈다.
그날들도 그랬다.
두 번의 방문, 두 개의 계절, 두 사람의 얼굴. 그리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두 장의 장면.
1. 낮의 손님 — 창틀에 걸린 한쪽 다리
그날은 맑은 가을이었다.
집은 사거리 모서리에 있었고, 대문은 늘 열어 두었다. 누군가는 꽃을 따 가고, 누군가는 고추 몇 개를 꺾어 가던 정 많은 동네였다.
거실 쪽에서 ‘부르르’ 창틀이 흔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나가 보니 한 남자가 창문을 넘고 있었다.
한쪽 다리가 창에 걸린 채, 반쯤 안과 밖에 걸쳐 있는 모습.
말쑥한 옷차림, 깨끗한 얼굴. 그러나 두리번거리는 눈빛은 멍했고, 시선은 나를 스치되 머무르지 않았다.
나는 벽에 등을 붙였다.
심장이 먼저 달려 나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그는 조용히 실내를 훑어보고는, 들어올 땐 창으로, 나갈 땐 현관문으로 나가 신발을 가지런히 신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숨 멈춘 그 몇 분이 길었다. 공기가 얇았고, 시간은 비닐처럼 달라붙었다.

2. 밤의 손님 — 달빛에 드러난 실루엣
겨울엔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긴 치마, 또렷한 실루엣, 그리고 입술에서 쏟아지는 거친 말들.
윗 동네에 사는 남편 친구의 동생이라는, 마을이 모두 아는 그 여인의 신상.
누군가의 폭력, 오래된 상처, 더 일찍 닫혔어야 했던 마음의 문.
그녀의 언어는 현실의 경계를 밀어내며 방 안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잠시 후 가족이 와서 그녀를 데려갔지만, 집안을 온통 헤집었던 난무하던 욕지기는 오랜동안 공기 속에 머물렀다.
추운 날씨를 아랑곳 하지 않고 거실문을 활짝 열어 젖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달빛 아래에 선 실루엣이 문장처럼 떠 있었고, 그 문장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3. 세포가 먼저 기억한 것들
이 두 장면은 내 뇌 속에서 지금도 ‘재생’이 가능하다.
그건
‘생각’의 기억이 아니라 감각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눈이 본 윤곽, 귀가 들은 문소리,
살결에 닿았던 공기의 온도, 심장이 만들어낸 박동. 시각·청각·촉각·자율신경이 동시에 올라섰던 순간,
세포는 사건을 ‘기록’이 아니라 ‘영상’으로 보관한다.
그래서 잊히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기억을 머리에 둔다고 말하지만, 실은 몸이 먼저 알아차리고 몸이 먼저 저장한다.
해마는 장면을 묶고, 편도체는 그때의 감정을 봉인하고, 자율신경은 심장의 속도를 파일 이름처럼 붙여 놓는다.
그러니 계절이 비슷해지고, 바람이 닮아오면, 세포는 알람처럼 옛 파일을 다시 연다.

4. 공포가 아니라 연민으로 남은 이유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으로 남았다.
두 사람 모두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다만 현실의 문과 마음의 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상처가 그들의 언어가 되어 내 집의 문을 열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할 때, 우리 신경세포는 거울처럼 반응한다.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은 추상적인 미덕이 아니라 실제로 몸에서 발생하는 공유 신호다.
그래서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까지 심장이 두근거린 건,
겁 때문이 아니라 공감의 잔향 때문이었다. 내 세포가 그들의 그림자를 잠시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5. 계절이 기억의 질감을 만든다
첫 장면은 가을,
두 번째는 겨울.
낙엽이 긁히는 소리, 마른 햇빛의 각도, 달빛이 만든 경계선. 계절은 기억의 배경음이자 질감이다.
같은 사건도 계절이 다르면 다른 색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금도 가을밤 창문이 조금만 흔들려도, 내 안의 세포들은 그때의 긴장과 연민을 동시에 되살린다.
그건 병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을 잊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6. 이름 붙일 수 없는 손님, 이름 붙일 수 있는 마음
그들을 ‘불청객’이라 부르자니 마음이 걸리고, ‘손님’이라 부르자니 또 어딘가 어색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은 분명 손님이다.
문득 찾아와 잠시 잠깐 머문, 이름 붙일 수 없는...손님.
대신 나는 내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
주저하는 두려움, 조용한 연민, 늦게 찾아오는 안부. 결국 기억은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증언으로 남는다.
우리는 사건을 잊어도, 그때의 나를 오래 기억한다.

7. 세포는 닫히지 않는 문이다
세포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도 어떤 형식을 고집한다.
나를 지키려는 형식, 타인을 이해하려는 형식.
그 형식 덕분에 우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떨고, 또 비슷하게 손을 내민다.
세포는 닫히지 않는 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은 내 안에서 감각의 형태로 계속 산다.
우리는 그 문을 함부로 닫지 않기로 배운다.
닫는다고 끝나지 않기 때문이고, 열린 채 견디는 법이 우리를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8. 오늘의 결
두 손님이 다녀간 지 오래다.
그러나 여전히 가을이면 창문을 한 번 더 확인하고, 겨울이면 달빛에 잠깐 서 본다.
그때마다 심장은 지난 파일을 열어보고, 나는 내 장면들을 조용히 정리한다.
나는 이제 안다.
기억은 잊는 싸움이 아니라 잘 놓아주는 훈련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훈련의 가장 깊은 근육은 연민이라는 것을.
> 세포는 사건을 저장하지 않는다.
그때의 온도, 소리, 떨림, 공기를 저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 서로를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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