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없이 센치해 지고

세포도 세대처럼 흐른다.
매 순간 낡고, 다시 태어나며,
우리 몸 안에서 시간의 강을 만든다.
나의 세포는 엄마에게서,
그리고 아이에게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 속에 있다.
그 사이 어딘가, 나는 지금 서 있다.
시간이 조금 느려지고, 마음이 자주 뒤를 돌아본다.
젊을 때는 그저 쓸쓸함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삶이 나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창밖으로 담쟁이 넝쿨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작은 바람에도 하릴 없이 떨어지는 노란 은행잎 하나에도,
나는 내 나이를 들춰본다.
내가 몇년생이더라...이유없이 센치해진다.
젊음이 빛으로 찬란했다면, 지금은 그림자처럼 어둡고 깊다.
그러나
빛이 사라져야 그 안의 색이 드러나듯,
이제야 나는 나의 진짜 색을 마주한다.
저물기에는 눈물나게 현란하고 아름답다.
들뜨지 않는 가을색으로 언제나 깊고도 진중하다.
지금 나는 나답게 물들어 가는 중이다.

엄마를 마주하며 나를 마주한다.
도심을 벗어나 영주로 향하는 길.
하늘은 투명하게 맑고, 산은 붉고 노랗게 물들었다.
차창 너머로 스치는 풍경이 너무 예뻐서,
그 예쁨이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나는 지금,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몇년 전 신우신염으로 쓰러진 뒤,
수시로 열이 오르고 119에 실려가며 모두들 놀래키는 우리 엄마.
작년 가을 이 맘때도 엄마는
병원에서 나를 맞았었었다.
"엄마~~"
병실에 들어서니 넋나간 듯한 눈을 힘없이 돌리더니 나를 보고는 링거를 꽂은 팔과 함께 두 팔을 든다.
"엄마~~"
"바빴더나~"
그러고는 내 뺨을 힘 없는 손으로 비벼댄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보다 눈빛이 더 많은 이야기를 대신하는 엄마.
나도 말 없이 엄마 손을 만지작 거리고만 있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몰라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삶이라는 강 위에서
나는 지금,
아이의 젊음과 엄마의 노년 사이 그 어디즈음
그 경계에 서 있다.
누가 먼저 가고,
누가 늦게 가는 문제가 아니라
삶이라는 강 위에서
각자 자기 속도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저,
오늘 시리도록 아름다운 가을하늘과 가을길을 마주하면서도
아름다움보다 더 큰 저릿함을 안고 달려오던 길은
세대와 세대 사이를 잇는 마음의 길이었다.
엄마가 젊었을 때 흘리던 땀과,
내가 지금 흘리는 눈물이 어쩌면 같은 결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60대의 가을은
봄처럼 들뜨지도, 여름처럼 급하지도 않다.
대신 모든 걸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게 되는 나이,
조용히 단풍이 드는 걸 기다릴 줄 아는 나이.
젊을 땐 지나쳐버리던 바람 냄새 하나에도 마음이 멈춰 서서 가슴을 열어보는 나이.
이 나이의 가을은 철학이기도 하고, 감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변하고 있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여유가 생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느끼는 이 계절은 단순히 낙엽의 색깔이 아니라,
살아온 시간들이 스스로 빛을 내는 시기인 것이다.
세포가 기억한다면,
그건 아마도 이런 마음일 것이다 —
사랑하고, 기다리고, 다시 흘러가는 것.
가을은 원래 이런 계절이다.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낙엽이 떨어지는 건 끝이 아니라 순환이고,
삶이 저무는 건 사라짐이 아니라 전해짐이다.
나는 결국,
나를 키워낸 엄마의 세월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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