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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다

계획 되지 않은 길 위에서 만난 1월의 운치: 덕수궁 돌담길 산책

by iipopnamu 2026. 1. 16.

익숙한 5호선을 벗어나 만난 풍경


평소대로라면 나는 지금쯤 지하철 5호선의 일정한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조금 달랐다. 

스포애니 광화문점에서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나선 뒷문, 그곳에서 문득 덕수궁길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밤새 비가 흩뿌린 듯 촉촉이 젖은 덕수궁 돌담길.


무언가에 홀린 듯, 

발걸음은 평소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밤새 비가 흩뿌린 것일까. 

땅은 기분 좋게 촉촉이 젖어 있었고, 

그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계절을 잊은 새싹들이 금방이라도 움을 틔울 것만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서울의 첫 겨울, 그리고 친구의 안부


어느덧 영하의 공기가 익숙해질 법도 한 1월. 

추운데 잘 지내느냐는 친구의 다정한 안부에 괜한 너스레를 떨어본다.


"친구야, 걱정 마. 서울 날씨나 부산 날씨나 거기서 거기지 뭐."


사실 서울 생활이 처음인 나는, 

이곳에서 맞이하는 첫겨울이 꽤나 긴장됐었다. 

그 긴장감을 들키기 싫어 던진 농담에 친구는 

"아직 1월이거든"이라며 짧은 실소를 터뜨린다. 

그 웃음 섞인 핀잔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정겹게 스며든다.


덕수궁 돌담길,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운무로 살짝 가라앉은 덕수궁길은 평소보다 더 깊은 운치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바쁜 출근길의 인파 속에서 오직 나만이 

다른 시간대를 걷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차가운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이 길만이 줄 수 있는 '느낌적인 느낌'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그 찰나의 여유가 너무 달콤했던 탓일까.

멀게만 느껴졌던 지하철역은 생각보다 빨리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조금 돌아가면 어때, 이것도 삶의 리듬인 것을

 

지하철에 몸을 싣자마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포스팅을 시작한다. 

어느새 글쓰기는 내 하루의 빼놓을 수 없는 의식이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복잡한 인파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방송 소리가 심상치 않다.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가려면 천안행을 탔어야 했는데, 열차는 인천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신도림역에서 급히 내려 다다음 차를 기다리고, 다시 7호선으로 갈아타며 40분이면 올 길을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평소라면 짜증이 날 법한 상황이었지만, 

오늘 아침 내가 마신 덕수궁의 운무가 마음의 완충지대를 만들어준 모양이다. 

조금 돌아가면 어떠랴. 

덕분에 평소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오늘의 감정을 기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가끔은 길을 잘못 드는 것이, 

더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아침이다.

 

그렇게 또 하루가 시작됐다.

 

아침에 끄적인 글은 이렇게,

다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내 기억으로 끄집어 내어져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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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어 만난 선물


익숙한 길의 리듬을 잠시 잊고
젖은 땅이 이끄는 대로
덕수궁 돌담 그 굽이진 품에 들었다.


어제 내린 비는 안개로 피어올라
바쁜 세상을 희뿌옇게 가려주고
나만이 주인공인 영화 한 장면을
돌담 밑에 가만히 깔아두었다.


"아직 1월이야" 실소하는 친구의 목소리


서울의 첫겨울은 차가운 법이라지만
함께 걷는 이 길엔
벌써 수줍은 새싹의 온기가 머문다.


인천행 열차에 몸을 잘못 실은 아침
당황한 가슴을 다독인 건
방금 전 폐부에 담아온 덕수궁의 운무.


조금 돌아가면 어떠랴


길을 잃어야만 만나는 풍경이 있고
헤매어야만 비로소 적히는 문장이 있는 것을.


길 위의 모든 어긋남은
나를 더 깊은 사유로 안내하는
오늘의 가장 다정한 초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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