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크리스마스 이브.
막내네와 점심을 함게 먹고 서로의 연말연시 안녕을 인사하고는
혼자서 터덜터덜 덕수궁 돌담길을 한바퀴 돌았다.

내게는 오늘이라고 뭘 특별할 게 있겠냐만...조용하다.
뭔지 모르게 휑하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돌담길 따라 죽 늘어선 프리마켓에 바람에 펄럭이는 천막들만 운다.
한바퀴를 천천히 돌아서 나왔더니
뉘엿히 해가 저무는데
형형색색 트리가 어둠을 타면서 그제야 하나씩 뽐을 내기 시작한다.
광화문 전광판 곳곳에는
현란한 광고와
폭발하는 그래프, 붉은 속보, 자극적인 키워드가 쉴 새 없이 바뀐다.
세계 어디선가 전쟁이 나고,
어디선가는 시장이 무너지고,
또 다른 곳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바꾼다고 한다.
자극은 넘친다.
구경거리도 차고 넘친다.
사람들의 말은 더 커지고, 더 자극적으로 쏟아 놓는다.
너무 많아서 내 머리에는 없다.
조용하다.
신호가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파도처럼 건너오지만 조용하다.
표정은 무덤덤하고 예전처럼 시끄럽지 않다.
걷고 있지만
어딘가에 도착하려는 얼굴은 아니다.
눈은 화면을 기억하고
몸만 이 길 위에 남아 있다.
현실의 추위보다
손바닥 속 영상에 더 민감해진 사람들.
세상은 경험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쪽으로 기울어버린 것 같다.
사람은 많지만, 소리는 낮다.
이 풍경이 요즘의 표정인가.
이랬다
몇 년 전만 해도 인싸거리 홍대 앞 골목은 달랐다.
어디선가 음악이 새어 나왔고,
카페 안에서는 목소리가 서로를 덮었다.
바쁘다는 말이 인사였고,
일정이 많다는 것이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어딘가 놓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렇다
요즘은 어느 카페든 들어가면
말보다 키보드 소리가 먼저 들린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앉아 있고
서로 아는 사람들 조차도 대화는 없다.
각자 할 일을 하고,
각자 나갈 시간에 조용히 일어난다.
“잘 지내?”라는 질문에
“그냥 무난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이 풍경과 닮아 있다.
그런데
어떤 곳은 여전히 북적인다.
댓글이 쌓이는 뉴스 기사 아래,
실시간 채팅이 멈추지 않는 라이브 방송,
익명 게시판의 특정 이슈 글.
거기엔 사람이 몰리고,
말이 쏟아지고,
감정이 빠르게 오간다.
생각해보니 그 곳은 비대면의 공간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일까
누구도 설명하지 않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말을 줄이고,
노출을 줄이고,
관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조용히 사는 게 목표가 된 시대라는 말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처럼 느껴진다.
더 크게 외치지 않아도 버틸 수 있는 쪽으로,
눈에 띄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쪽으로.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소음을 낮추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는 중이다.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미덕인 양.
그저 스크롤을 넘긴다.
그러다가
가상의 인물에게 감정을 맞춘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얼굴,
화면 속 캐릭터,
실존하지 않는 이야기.
현실보다
가상에서 감정을 소비하는 게 어느 게 더 익숙해진 사람들.
사람들은 현실에선 조용해졌지만
댓글창에선 여전히 분주하다.
얼굴은 숨기고, 말은 쏟아낸다.
침묵은 오프라인의 선택이고 소음은 온라인의 습관이 됐다.
그래서 생긴 풍경
세상은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는데
사람은 점점 더 무뎌진다.
폭발적인 뉴스와 무기력한 표정이 같은 화면에 공존한다.
이건 무관심이 아니라 과부하에 가까운 상태다.
너무 많은 것을 봐서,
아무것에도 깊이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의 진짜 의미.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은
평온이 아니라 차단에 가깝다.
세상을 외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서.
손바닥 안의 세상만 관리하면 그나마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요즘 사람들이 원하는 평온은
세상을 잘 사는 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잠시 로그아웃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의 구경
사람들은 여전히 구경한다.
다만,
멀리서 본다.
깊이 들어가지 않고, 몸을 담그지 않는다.
경험은 축소되고,
감정은 요약되고,
세상은 스크롤 하나로 소비된다.
그게 지금의 웃고픈... 세상 구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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